베드로의 변화된 영성

2005.05.25 15:44

김승천 조회 수:3748



<strong> 베드로의 변화된 영성</strong>

사도행전 2장 14절 - 21절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를 하는 중에, 베드로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판 가룟유다 대신에 누구를 대신 채워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다말고 일어서서 가룟유다 대신에 다른 한 명을 제자로 뽑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결국 제비를 뽑아서 맛디아 라고 하는 사람을 예수의 12제자 중에 하나로 택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왜 11명을 뽑지 않으시고, 13명도 뽑지 않으시고 12명을 택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 처럼,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포함한다는 뜻에서 12명을 택하셨는지, 아니면 12명이 가장 제자 훈련의 학습에 효율적인 숫자 였는 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12명을 뽑아서 3년을 데리고 다니셨고, 가룟유다가 배반에서 11명으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11명에 한 명을 더해서 12명을 채워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누가 한 명 빠지게 되면 그 자리를 대신 채우라고 하는 암시를 준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한 명을 채워야 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기도하다말고 암암리에 존재의 다름을 느껴야 했고, 결국 누구를 뽑느냐? 하는 것에 나서야 했습니다. 그리고 맛다아와 마지막까지 경합했던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그곳에 기도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 그들은 거의 늘 함께 하는 사람들이라고 22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따라야 하는 예수님이 계신 상황도 아닌 마당에, 그들 모두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여겨 사역이 확대되고 하나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오히려 구분하고, 사람들 마음의 격차를 벌려 놓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것이 바로 성령 받기 전에 베드로의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기도하지 않고 딴 짓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을 덜 받은 것도 아닙니다. 만약 제자들을 5년 훈련시킬 필요가 있었다면 주님은 28살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셨거나, 아니면 35살까지 사역을 하셨을 것입니다. 3년이면 예수님이 전하고 싶은 것을 다 전해 주셨고, 베드로도 충분히 주님의 교훈을 익혔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기 전에 베드로의 영성은 아직 눈을 뜨지 못했고,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제가 참석했던 유럽 목회자 세미나에서 어느 목사님이 영성은 훈련되거나 개발되는게 아니라고 역설했습니다. 고양이를 소림사에 30년 데려다 놓는다고 호랑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성은 훈련되거나 개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부어지는 것이고,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했지만, 그에게 성령이 부어져 그가 새로 태어나기 전에 그의 영성은 꽉 막혀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 공부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구원의 감격, 은혜의 체험이 없이 성경 공부만 한다고 사람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예수님으로부터 생생한 교훈을 받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그 12제자, 그 숫자를 중시여겼고, 사람들의 마음을 화합보다는 껄끄러움에 남게 했습니다. 그렇게 12명의 제자를 다시 채워서 어떻게 했다는 기록도 없고, 그렇게 대신 뽑힌 맛디야가 어떻게 사역했다는 것도 없습니다. 12명을 추수리는 것은 결국 그들 중에 수제자 격인 자기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고, 수직적인 서열을 가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은 그들이 모여서 기도하다가 갑자기 베드로의 발언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제자를 보충하는 기사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3장으로 가서 나타나는 베드로는 결코 1장에서 나타난 베드로가 아닙니다. 그때도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은과 금이 없어도, 그것을 가진 것 보다 훨씬 더한 자유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일어나 본적이 없는 사람의 손을 잡아서 일으켰습니다. 베드로의 담대함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가 예수님을 따를 때에도 종종 그가 나타냈던 행동 때문에 그가 무척 용기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용감한 것이 아니라, 무식한 것이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는데, 딱 베드로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앉은뱅이 앞에서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베드로는 진정으로 용감하고 담대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그런 이적을 행할 때,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베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3장 12절에 "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했습니다.

1장에 나타난 베드로 같으면,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능숙하게 숨길 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도 좋다고 하는, 충분한 자유의 유연성이 그에게 있어야만 말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12명에서 한명 빠졌다고 채워 넣어야 한다고 기도를 중단시킨 그런 영성이 아닙니다.

돈 없으면 금방 숨막혀 죽을까봐 걱정하는 분들 계시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그것보다 훨씬 능력이 되며, 자유가 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요즘에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너무 맡기지 않아서 무척 한가롭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너무 계산적으로 할 수 있는 일만을, 너무 합리적으로 가능한 일만을, 자기가 이룰 수 있는 한계 내에서만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서야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돈이 이 시대에 능력이고, 힘인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더 능력이고, 힘이고, 자유입니다.

또 사람들 중에, 자기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 일은 전혀 관심 없고, 어떤 일에든지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켜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베드로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네가 최고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박수치고 환호했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의 놀라워하는 눈빛, 그 눈빛이 자기를 주목하는 것조차, 그는 예수께로 돌리고 자기는 감추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강자이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럴 때,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 나타난 베드로는 메마른 영성의 베드로, 철저하게 관습에 묶여 있는 영성, 그래서 자유도 없고, 풍요도 없는 영성, 그런 영성의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3장의 베드로는 은보다 귀하고, 금보다 큰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탁된 권능의 자유가 있는 영성입니다. 얼마나 풍성하고, 얼마나 힘이 있는지, 그리고 자신을 감추고 예수만 드러내는 자유로움이 얼마나 큰지 1장과 비교할 수 없는 풍요로운 영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1장에 나타난 베드로와 3장에 나타난 베드로가 다르다면 2장에 분명히 무슨 사건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강림의 역사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성령 강림의 의미를 바로 새기는 주일입니다. 프랑스는 이제 성령 강림주일 같은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래 전에 그냥 하루 노는 날이 되어 있었는데, 사회 분담금을 보충한다고 하는 의미로 없애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꼭 그 날을 쉬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따져 보자면, 성령 강림절이야말로 예수 탄생의 의미에 결코 뒤질 수 없는 획기적인 날입니다. 축복의 날로 치면 그런 축복의 날은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한 사람이 일년에 한번 성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지역적으로 한정된 곳에서 한정된 사람들이 성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영역의 모든 시간에서 성령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서나, 언제든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전천후의 능력 있는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이 성령 강림의 역사입니다.

성령 강림 이후에 초대 교회의 성도들의 역사는 대단했습니다. 스데반과 빌립을 비롯한 일곱 집사들, 사도 바울이 나타낸 능력... 그러나 우리가 성령받기 전과 받은 후를 가장 대비해서 알 수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고, 그 중에 더 두드러지는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큰소리 많이 치고 덜렁거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로 나아갈 때, 멀찍이 따르다 세 번 부인하게 된 심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도 그는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을 때, 무슨 거사를 도모하려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용기가 충전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오순절 날 성령 강림의 역사가 있은 후 베드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더 이상 심약하지도 않고, 더 이상 현실에 묶여서 주춤거리지도 않고, 무엇을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방언을 말하고, 영을 분별하여 투시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역사를 행하게 됩니다. 저주하고 모른다고 했던 그 이름 예수가, 부끄러워했던 그 이름 예수가, 축복의 그 이름이며, 생명의 그 이름이라는 사실을, 세상 모두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그 이름이라는 사실을 베드로가 알게 된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마치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베드로의 단계에 머무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찾아온 디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과같이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는 은혜, 그래서 모든 사슬이 한 순간에 다 풀어져 버리는 역사가 없이 예수를 믿는 것은 신앙의 진수를 맛보지 못한 것입니다. 학습의 효과가 아니고, 훈련의 결과가 아닌 부어짐의 역사를 통한 새로운 태어남, 성령의 강림은 바로 그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예수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찾아오신 예수를 만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세상에 예수 그 보다 더 존귀한 것이 없다고 선언할 수 있는 삶, 정말 예수 그 이름이 그렇게 좋은 영적 풍요가 바로 성령 강림의 증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믿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도 별로 나타내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 믿어서 뭐가 달라지는지 모릅니다. 아직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성령 받은 베드로가 설교하는 것입니다. 상황적으로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설교하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도 있는 그런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옛날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령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원근 각처에서 예루살렘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이미 성령 받은 제자들의 변화로 인하여 놀라서 소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저들이 술 취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지금 몇시인데 우리가 술취해 있겠느냐?고 하면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말씀은 바로 "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라 "고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말세는 주님이 처음 오셨다가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를 말세라고 말합니다.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여기 모든 육체는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내 영을 부어준다고 하는 것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의미할 뿐 아니라 모든 육체에 부어진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강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는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외적인 지위와 상관없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야 하거나, 명예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 상관없이를 말합니다. 물론 남녀 노소 아무 구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성령 부음을 입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너희 자녀들은 예언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성령의 은혜에 동참하는 자가 될 것이며, 그에 따르는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의 영을 부으사 우리로 하여금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그래서 이 시대에 비젼을 제시하고, 역사를 일으키며, 변화시키는 사람들로 삼기 원하십니다. 자기의 인생하나 주체하지 못해서 쩔쩔매고 계집종 앞에서조차 두려워하며 벌벌 떠는  베드로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을 불러모으며, 유대인이든지, 서기관이든지, 장로들이든지 다 나와서 들으라고 복음을 전파하던 그 베드로처럼, 이 시대를 향해서 외칠 수 있는 담대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지 않으면서 교회 생활하면 그 메마른 영성이 그대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꾸 사람들을 편가르고, 자기의 우월을 주장하고, 형식에 치우쳐서 사람들을 정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하면 자유하게 됩니다. 자기가 안 드러나도 좋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나타나면 그만입니다. 주변에 도전을 주고 새 삶을 열어줍니다. 복음 증거에 담대함이 생깁니다. 생전 누구에게 예수 믿으라는 말 한마디 못하던 사람이 입이 떨어져서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말이 예언입니다. 말하는대로 응답됩니다. 축복의 말을 하면 축복이 임합니다. 주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주하면 저주가 임합니다. 병든자를 위해서 기도하면 치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얼마나 짜임세 있는지, 베드로는 오늘 본문 이후로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는데,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23) 전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활에 대해서(24-32) 전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승천에 대해서(33-36)에 대해서 전하고, 그분의 구원에 대해서(37-39)에 전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새로운 공동체에 대해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완벽한 복음의 증거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짜임새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로 하여금 탁월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부어질 때, 그는 감성의 변화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말의 변화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모든 면에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주는 그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동일한 성령입니다. 그 성령의 충만함으로만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다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만이 우리를 탁월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능력 있게 할 수 있습니다. 무미 건조한 신앙인으로 남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를 변화시킨, 성령이 여러분 안에도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다시 사도행전의 역사를 써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세에 부어주시기를 원하시는 주의 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쏟아 부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은혜에 젖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향해 예언하는 남종과 여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같은 공동체, 퐁뇌프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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